
하루 종일 집에 있었지만, 피곤하다.
남들은 백수는 한가하다고 말하지만, 나는 안다. 가만히 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. 마음은 잠잠하지 않고, 머릿속은 멈추지 않는다. 해야 할 일은 없지만, 생각은 쉴 틈 없이 밀려오고,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조급함이 자꾸 등을 밀어댄다. 그러니 저녁이 되면, 나도 나름대로 지쳐 있다.
조용한 밤, 혼자 있는 방. 이건 내 작은 세계다.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,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. 내 맘대로 조명을 낮추고, 스탠드 불빛만 켜 둔다. 그리고 오늘도 내 취향을 꺼내 든다 — HARDY’S VR Moscato 2021.
처음 이 와인을 마셨을 때를 기억한다. 한 모금 입에 머금었을 뿐인데도, 그 향이 주는 위안은 꽤 컸다. 리치, 복숭아, 청포도 같은 향들이 하나씩 번지듯 퍼지고, 기분 좋은 달콤함이 입안에 감돌았다. 묵직하거나 센 맛이 아니라, 가볍고 산뜻한 그 느낌. ‘내가 좋아할 만하네’ 하고 웃었던 기억.
그리고 이 와인을 마실 땐 늘 함께하는 메뉴가 있다. 감자튀김과 김말이 튀김. 누군가에겐 이상한 조합일지 모르지만, 나에겐 이것만큼 든든하고 위로되는 안주도 없다. 바삭한 김말이 튀김 안에 들어찬 당면의 쫀득함, 감자의 짭짤한 고소함. 한 입 베어물고, 와인을 마시면 입 안에서 작은 잔치가 열린다. 달콤한 와인이 튀김의 기름진 맛을 씻어주고, 튀김의 짠맛은 와인의 향을 더 돋워준다.
TV에선 익숙한 예능이나 드라마 재방송이 흘러가고, 나는 천천히 튀김을 집어 먹는다.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, 뭘 이뤄내지 않아도, 이 순간엔 충분히 나다웠으면 좋겠다. 이런 평범한 저녁이 주는 감정은 생각보다 더 진하고, 더 오래 남는다.
예전에는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외롭지 않다고 믿었다. 혼자 밥 먹고, 혼자 술 마시는 건 어딘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. 그런데 지금은 안다. 혼자 있는 시간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챙길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걸.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, 오롯이 내 감정만 바라봐줄 수 있는 시간.
병이 점점 가벼워진다. 튀김도 거의 다 먹었다. 배는 부르지 않지만, 마음은 어느새 가득 차 있다. 오늘도 아무 일 없던 하루였지만, 이 와인 한 병과 튀김 몇 조각 덕분에 나는 다시 나를 토닥이고 있다.
밖은 여전히 시끄럽겠지만, 이 방 안엔 단 하나의 진실만 있다.
나는 오늘도 나를 위해 살았다.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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